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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3박4일중국여행) 沈阳/长春 심양/장춘, 청나라의 옛 수도는?

남방항공을 타고 북방, 장춘에 왔다. ^^;;;

 

호텔이 다소 모텔 같다. 어서와~~ 장춘은 처음이지?

 

한국의 차이나 타운과 느낌이 아주 흡사하다.

 

배가 고프다. 점심을 먹자.

 

나에게 있어서 심양 또는 장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양꼬치와 칭다오 맥주, 그리고

백두산이다. 칭다오 맥주는 예전에 양꼬치를 먹을 때 자주 먹었던 맥주라서 양꼬치 하면

칭다오 맥주가 연상되고, 백두산은 심양, 장춘에서 비교적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춘 야시장]

하지만,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서, 심양이나 장춘에서 백두산을 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기차를 타고 들어가서 다시 택시를 타야 하는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백두산은 다음 번에

가 보기로 하고, 청나라 고궁을 방문해 본다.

 

심양이 볼 것은 없다는 평가와는 달리 고궁은 나름 볼 만하다. 서구와의 잦은 교류로 인하여

화려한 색상의 도자기 등을 만들기 시작했고, 용이나 해태 등을 본격적으로 궁에 조각하여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다.

 

심양에서는 청나라 이야기를 빼놓고 할 수가 없고, 조선시대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잠시 조선시대 이야기를 포함하고자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뒤이어 1597년 정유재란으로 외침을 받았다. 

(임진년에 가 일으킨 난 -> 임진왜란,  정유년에 왜가 다시(再) 일으킨 난 -> 정유재란)

 

왜군과의 전쟁이 종식될 무렵, 조선은 황폐화되고 당시 구원병을 보냈던 명나라도 그 위세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이 시기 누루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우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지향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명을 받들고 후금을 배척)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번에는 후금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1627년 발발한 정묘호란이다.

(정묘년에 호(왜랑캐)가 일으킨 난 -> 정묘호란)

 

후금이 침입하여 의주 함락, 평산까지 내려오자 방비태세가 없던 조선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전하였으나,  서로 전쟁을 일찍 끝내야 하는 것에 공감하고 2개월만에 후금의 요구에 따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조선은 힘이 없었고, 후금은 명과의 전쟁, 군수품 조달

에 따른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병선을 요구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압록강을

건너 민가를 약탈하는 등 변방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이런 행위로 조선에서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 후금은 1636년 태종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고 심양에 고궁을 세워 도성으로 정한다.

명나라가 기울어지는 틈을 타서 중원으로 진출하여 전국 지배에 성공한다. 심양에 간 조선

신에게 조선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장하는 자를 압송하여 보내라고 하나, 조선에서는

요구를 묵살하였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을 재차 침입해 오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병자년에 호(왜랑캐)가 일으킨 난 ->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아픈역사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심양에서, 나는 양꼬치와 칭다오 맥주 밖에

생각이 나지 않으니 이것은 교육의 문제인가? 나의 문제인가?

단군 이래, 역사적으로 한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고구려때가 조금

나았으려나?

 

아래 사진 중, 가운데 제일 위에 있는 사진은

고궁속 깊은 호수에서 얼굴만 내놓고 수영을 하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이다.

역시 대륙인가...경복궁에 큰 호수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거기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역시 대륙인가...ㅎ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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